

그 임진왜란 때 제봉 고경명 그 할아버지께서는 60세에 밀양부사를 하셨어요. 그래가꼬 그만두고 여기를 오셨는데 광주죠, 지금 잉. 거그 막 오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그때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자기 큰아들 종 자 후 자 그분하고 둘째아들 임 자 후 자 그분 세분이서 인자 임란에 참여를 했는데.
막둥이인 용 자 후 자 할아버지가 있어요. 막둥이. 거가 여섯째였는데 거기서 그때 당시 열네살이였는데 나 따라 갈란다, 말고삐를 잡고 따라갈란다, 한께 “너라도 남아 있어야 어린 조카들을 거두고 너라도 살아남아야 나중에 후일을 도모할 것 아니냐” 해서 그 아들은 띠어놓고 금산 전투에 인자 참여를 했는데.
금산전투에서 인자 불행하게도 다 돌아가셨는데 그때 종 자 후 자 할아버지는 안돌아가셨어요. 큰아들. 왜 그랬냐 군량미를 또 대야 되잖아요. 7천 의병을 했으니, 7천 의병을 먹여 살려야 되니까. 군량미 걷으러 다니다가 금산전투에서 아버지하고 동생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 인자 복수를 해야 쓰겠다 하고 찾아간 곳이 진주성. 거기 가서 삼 장사가 죽었다는 고종우 최경애 또 한 분 있죠(삼 장사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그 세분이서 죽었을 때 거기서 같이 전사를 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4월, 매년 4월 15일이면 국가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즉, 표충사에서. 거기서 우리는 제사를 지낼 수가 없어요. 그 세분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그렇게 지내니까. 그래서 매년 4월 15일에는 광주 시장이 저희들을 초청을 하면 저희들은 거기에 가서 저희가 제사를 지내고 그라고 옵니다.
그렇게 돼서 인자 그 할아버지는 의병으로 해서 그렇게 돌아가셨고, 그 후로 300년이 흐른 후 녹천 고광순이 또 일제 거시기를 했는데. 근께 제봉 할아버지는 61세에 그때 돌아가셨지요. 녹천 고광순도 60세까지 의병활동을 하셨어요. 그래가꼬 돌아가실때가 또 61세였습니다.
녹천 고광순도 항일운동 그것을 쭉 하시다가 결국은 인자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담양 그 거기에가 고영준이라고 종손이 살고 계십니다. 그 종손이 이 마을에서 양자를 갔어요, 그 마을로. 그래서 그때 인자 지금까지 그 고영준 그 종손 형님께서 인자 집안 대를 이어오고 있죠, 지금.
그리고 나서 그 할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고영환, 요 형님께서 인자 그때 이십세 조금 넘어서부터 그때 청년활동 그런 것 하기 이전에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한 2년간 옥살이를 했어요.
그래서 한 2년간 옥살이를 하고 내려와서 여기 와서 인자 그때 인자 해방은 됐는데, 그때 인자 육이오 일어나기 전에 인자 일어나고 할 때 그 빨갱이들 나오고 어쩌고 하다 보니까 청년활동도 하고 이런 거 저런 거 하다가, 그 형님께서 2년 옥살이 하고 난 다음에 내려 오셔가지고 여기서 장흥군수를 쪼끔 했을 거예요. 초대군수를.
쪼금하고 그땐 미군정시대 때니까. 그 하고 나서 인자 나중에 2대 때 국회의원 당선이 됐죠. 인제 당선이 되가지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육이오가 난거예요, 육이오가. 그래서 인자 그만두고 육이오 난 다음에 세월이 쫌 흘러서 있다가 그 다음에 인자 군사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군사정변 일어나기 전에 그때 또 5대 때 당선이 됐었어요. 당선이 돼서 했는데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니까 또 그만두고.
그래서 사실상 두 번 국회의원 하셨다 하지마는 몇 년 하덜 못했어요. 그 전에 순전히 독립운동을 하다 보니까 야당에 몸담다 보니까 긴 거시기는 하지 못하고. 1978년도 전두환 아니 81년도죠.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렇게 거시기 할 때 그때는 모든 것을 접고 여기 내려오셔 가지고 인자 생을 마감하셨는데,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특별히 제가 아는 바는 없어요.
구술 고영천(장흥읍 평화리) 정리 문충선 사진 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