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면 어서 동학농민군 이경호와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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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마을에서 운주리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만난 부용산

동학농민혁명군으로 참여한 조부님이 장흥 석대들전투 패배 후 숨어들었던 운주리 부용사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오셨는지, 그 당시 집안에 숨겨놓았던 화승총을 어떻게 발견하여 지켜왔는지, 손주 이정신 회장(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을 용산면 어서마을 자택에서 만나 들었다. 이정신 회장은 시종일관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조부님의 역사와 삶을 이야기 했다.

(조부님이시죠. 조부님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해서 석대들에서 후퇴해서 부용사까지 피신을 가고 살아서 돌아오신 이야기. 또 화승총이 발견되었잖아요? 마을사람들도 많이 참여했을 거 아니에요. 그 이야기도 해주시죠.)

내가 듣기로는 먼저 형님이 우리 동학 나댕기셨고. 형님한테는 내가 자세한 얘기는 못들었는디, 위의환 선생님한테 듣는 얘기로는 조부님이 우째 동학에 참전을 하셨냐 그라면은, 큰 조부님은, 형제분이신디, 큰 조부님은 면에 출입을 하시고 우리 조부님은 시골에서 살림하시면서 농사짓고, 그랬는디 형님을 살리기 위해서 조부님이 동학에 투신을 했다 그러시더라고.

(아, 형님이 관직에 있으셔서…)

그렇제. 그렇게 얘기를 들었고 인제 그러니까 동학에 참전을 하셔가지고 1894년 12월 24일 날 저녁에 여기 어서마을에서 간부급들이 회의를 하셨다고 하더라고. 그래가지고 새벽에 자울재를 넘어서 넘어 가신거야.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대규모 전투가 석대뜰에서 다음날 벌어졌는디 아무래도 인제 화총 그걸 받어가지고, 나는 이제 조부님한테 직접 얘기를 못들었는디 형님이 하신 말씀이 백 메타가 못나갔대 총이, 화총 그것이 그래 아마 한 칠팔십 미타 나갔는가 몰라.

그것도 머 옛날에 보릿고랑 얘기를 하시면서. 보릿고랑 업저서 한참을 기어가가지고 쏘아야 저쪽이 맞이면은 시신이 되고 했다고 그런 얘기를 했다 하시더라고. 내가 지금 판단해볼 때는 화총 그것도 다 이렇게 전투하는 사람이 받는 게 아니고, 그때 당시 머 간부급들이 그렇게 받은 모양인갑드라고.

총기가 부족하니까. 그래가지고 25일 날 저녁에 석대뜰에서 후퇴를 하자 해가지고 하신 것이 아마 부용산으로 수십 명이 이렇게 피신을 하셨다 그러드라고.

그래가지고 절로 들어갔는디 안 나오니까, 머 마루 밑에 숨은 사람, 머 헛간채 숨은 사람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피신을 해서 있는디, 운주 거 나뭇꾼을 시켜서 뭐이라고 밖에서 외냐 하면은, 나온 사람은 살리고 안 나온 사람은 다 죽애분다, 그래가지고 거의 나간 사람은 거의 다 죽었대, 한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고 다 죽었는디.

조부님은 왜 살았냐, 부용산에 주지스님이 꽉 앙쳐놓고 못 나가게해, 법당에다 앙쳐나두고. 그랑께 마지막으로 우리 거시기였재, 우리 한국의 경찰이재. 관군을 시겨서 들어갔는디 법당에 주지스님이 뭐랑고면, 이 양반은 이 밑에 사시는 나뭇꾼인디 아무런 동학하고는 관련이 없다, 그랑께 딱 나가셨다 그래. 나가갖고 인제 나가부렀는디 하나도 살아남은 사람 없고 다 죽었다 그래.

그래가지고 인제 일주일이 지났는디. 우리 할아버지로 말하면은 종형님이, 동생이 인제 부용산으로 피신했단 소리는 들었는디, 죽었을 것이다, 다 죽었다 하니까, 송장이나 인자 찾으러 가야 쓰것다 그러고 바지게를 짊어지고 올라강께 살아서 내려오시더라, 딱 한 사람. 그래가지고 인제 운주마을 앞에 거그를 인제 형제분이 걸어내려오신께, 형님하고 동생이재 종형간.

그래 내려오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제 난리가 나부렀지. 부용산 피신한 사람 이제 다 죽었네 하닌까 난리가 났는디, 동네 사람들이 그때는 머 이렇게 마을앞에가 사람들이 나와서 서서 구경하면서 저런 양반이 안 살아오믄 누가 살아와야, 그렇게 감동적인 얘기를 하시드라고.

(할아버지가 동네사람들한테 인심이 좋았나봐요.)

그러닌까 이쟈 내가 판단하기는 지금 내가 이렇게 어르신들한테 전해 듣고 내가 이렇게 판단하기는, 아마 할아버지가 인간성도 좋고 항상 그 뭔가를 좋은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신 양반인 것 같에요. 그래서 아마 마을 주변이나 다른 마을에서도 그렇게 인제 아, 참 좋은 양반이구나, 이렇게 칭찬을 받고 그라고 사신 분인 것 같아요.

(그 화승총은 어디서 발견됐나요?)

화승총은 인제 어르신들 얘기를 들어보면은, 에~ 한동안은 애기들이 아까 무서와서 고광에다가 숨겨놨다가, 또 작은 집이가 아버지 형제분이 4형제 분이신디, 백부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두 번째가 우리 아버지고, 세 번째 작은 아버지 집에다 또 갖다 숨겨놨다가, 고걸 어떠게 어떠게 해서 이제 질게 보관을 못할테니까, 인제 큰 집이 할아버지 댁에 마루 밑에따가 아마 놔둔 것이 개머리판은 썩어 불고, 그 총열만 살아있어 가지고.

그 총이 왜 발견이 되았냐면 형님이, 큰집 형님이 아들을 여울라고 아래채를 뜯고 그 개축을 할라고 뜯다보니까 그 밑에서 그 총열이 나온거야. 그걸 그래도 안 버리고 놔뒀다가 어떻게 해서 이제 형님이 그때 당시는 출입도 하시고 그란 양반이라 묘하게 종찬 씨하고 얘기가 되았던 거야.

인제 종찬 씨가 그런 것이 있으면은 박물관에다 보관을 하게 저한테 돌려주십사 해가지고, 한동안 잊어부렀다고 또 난리가 났어. 종형들이 이제 찾아야된다 해 쌌고 하다가 그락저락 하다가 넘어가부렀는디. 그때 인제 우리 문국장하고 찾으러 갔을 때 보니까 이종찬씨가 대단하게 해놨드라고. 다 보관지까지 관장한테 보관지까지 받어서, 언제든지 장흥에서 필요로 할 때 이걸 좀 돌려줄 수 있겠끄롬 딱 보관증을 그렇게 써놨드라고. 그래서 아 역시 참 대단하신 양반이구나.

(조부님이 성함이 함자가…)

이 경자 호자.

(좀 오랫동안 사셨나요? 그 때 살아돌아오셔서…)

그 뒤로 인제 84세까지 살으셨제, 오래 살으셨제.

(그러면 회장님도 그때 조부님을 뵈셨어요?)

그렇지. 그랑께 인제 우리는 동학이 일어났던 때는 외가에가 있었고, 그 뒤로 인제. 암튼 내가 보기에는 조부님은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여. 왜 훌륭하신 분이냐, 형님은 배워가지고 관에 나댕기시고, 이 양반은 집에서 살림하고 농사지신 양반인데, 문사일은 우리 조부님이 훨씬 더 많이 했어, 큰 조부님보다.

내가 왜 그걸 놀랬냐 하먼, 내가 이제 성장해가지고 장동 노인당을, 원래 내 직업이 건축이었거든. 장동 노인당을 가서 꾸미고 있는디, 이 마을에서 나보다 10살 더 자신 선배님하고 나하고 둘이 가서 꾸미고, 목수는 지금도 이제 웃마을에 살고 계신디 그 양반이 그 집을 맡아서 한디.

어떤 양반이 한창 일을 하고 있는디, 오야 자네들 어서 왔는가 하고 묻드라고. 그래서 용산면 어산서 왔습니다, 그랑께는, 용산 어산하고 관련이 있는 양반인가, 아무튼 그라면 어산서 왔당게 반갑네 그라시면서 뭔 얘기를 허시냐면, 그람 혹시 아버지 함자를 대겄는가, 아 대라고 하믄 대지요, 그라고 인제 우리 선배님보고 대라항께, 그 양반은 아버지나 조부님이나 함자를 모르시더라고, 그 어르신이, 장동 그 어르신이.

그라먼 자네는 누 아들인가, 물어서 인제 아버지는 아마 출입이 없어서 모르실 겁니다, 그라고 했더니, 그라믄 조부님은 누군가 그라고 묻더라고. 그래서 조부님이 이 경자 호자랑께 깜짝 놀래부러, 그 양반이. 아 니가 그 양반 손자냐, 그라고 직계냐고 묻더라고, 예 그랑께, 참 훌륭하신 어르신이라고. 그래서 역시 문사 일도 조부님이 더 많이 하셨구나, 그 생각이 들었고.

또 어려서 들어볼 때는, 지금 이 너매에 그 제각이, 영석재란 제각이 우리 용산면 인천 이가들 대표적인 제실이거든요. 근디 그 제각을 질라고 우리 용산면 남면 문중에서 문임을 내노면은 한 달을 못하고 자빠라져부러, 문임들이. 그때야 뭐 지금같이 이렇게 숫자가 많이 살었겄어요, 안 살았지. 그래 인제 마지막으로 조부님을 선정해서 조부님을 감찰조사 문임으로 내놨는디, 삼 년을 어울러서 그 제각을 끝마무리를 하셨다 하더라고 조부님이. 그런 걸 보면 대단하신 양반이여.

(지역에서 신망도 있고 지식도 있으시고 그러니까.)

그래서 나 어려서 인제 나는 일찍이 조실해불고, 사실은 조부님이 계셨기 때문에 큰집이 가서 많이 살았제. 저닉에믄 거그 가서 자고. 그런데 보면은 아무튼 마을에서 훌륭하신 어르신들, 조부님 또래라든가 이상이라든가, 그 양반들이 새벽에먼 꼬옥 오셔서 대문을 뚜드리면서 조부님하고 그 새벽에먼 꼭 뭔 얘기를 해싸시더라고. 어려서 얼핏 들어보면은 마을에 무슨 일, 또 누 집이는 어쩧고 누구는 머 어쩧고, 이 놈을 벌을 줘야 쓰겄드라 이 놈은 칭찬을 해야 쓰겄드라, 이런 얘기를 쪼그막 한디, 나는 이제 옆에 누워서 자지요, 그러면은 그런 얘기들을 어르신들이 많이 하시드라고…

조부님이 이제 촌장 격으로 대소사를 의논하러 오는가봐요.

근데 인제 이 근자에 들어보면은 같은 우리 비족은 비족이지만은 애당초에 원래 아냥이 고향이었는디 아냥이 출생이었는디, 그 양반도 팽야 인천 이가는 인천 이간디. 그 양반들이 그 양반 형제분들이 여그를 들어오셨을 때 우리 조부님이 서두러서 집도 마련해주고 해가지고 여기서 아마 한 이 대, 그랑게 약 한 육십년 칠팔십년 되았겠제, 약 삼대 가차이 살었으니까 백여 년.

근디 다행이 그 냥반들이 어산으로 오셔가지고, 형제분이 살았는디 어산 오셔가지고, 그 손자가 사법고시 합격해가지고 지금 서초동 본부에 있다 하디야, 진직 부장판사는 달았고. 아마 그 그런 훌륭하신 조부님이 애기를 해내가지고 어산 와서 그런 훌륭한 손자를 두시고 그래갖고, 그 냥반들이 그래서 인제 촌수는 못 따지지마는 이렇게 참 훌륭하신 손자를 나가지고, 아마 그놈이 지금 대법원 인사부에도 있고 그래나서, 좀 앞으로 잘만하믄 크꺼여.

구술 이정신 정리 문충선 사진 지산

부용산에서 어서마을로 가는 길목에 있는 450년된 운주리 당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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