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순지마을 묵기 좋다.독시암물 못다 묵고 내가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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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지마을은 오늘 만난 큰애기들이 시집 왔던 60여 년 전에는 100가구 정도 5-600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가구 수(55)는 많은데 달랑 84명이 살고 있습니다. 큰애기들이 시집 왔을 때만 해도 마을 뚬벙에는 이쁜 연꽃들이 천지였고 미나리꽝이 있었다고 합니다. 순지라는 이름이 미나리 蓴 연못 池로 이루어진 걸 보니 미나리꽝은 아주 오래된 것인 듯싶습니다.

순지마을 여자노인당에 들어가니 늙은 어머니들의 바람인양 액자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百世童顔不作翁. 하긴 요새 백세인생(팔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만해서 못간다고 전해라)를 이야기하는 노래도 유행하는데 무슨 대수라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부분 팔십을 넘긴 쭈글쭈글한 어머니들의 얼굴과 마음속에는 아직 동안이 남아있었습니다. 아니 그 어렵고 가난했던 큰애기 시절이 너무나 그리운 표정이었습니다. 자리에는 백세 어르신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사시는 아흔 넷 드신 김일례 할머니도 계셨습니다. 오늘 별 말씀이 없으셨던 아흔 넷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당신 집으로 한 번 들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할 이야기가 아주 많으신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특이하게도 시집갔다 아파서 다시 고향 탯자리로 돌아와 여직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깽맥이도 잘 치신다는 할머니의 역사는 뒤로 하고 이제 우리 순지 늙은 큰애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시집 온 이야기, 옛날 농사짓던 이야기, 남편 이야기 등 무궁무진. 하지만 오늘은 짤막하게 재미진 이야기 몇 토막 소개합니다.

김승운 이장이 마을방송을 하고 큰애기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먼저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계론(결혼)할 때 만도 연꽃이 아조 이렇게 조왔는디, 순지하면 연뚬벙이 유명했제. 오염되고 인자, 지금 피기는 핀디 여나믄 꽃이여. 사람들이 여름이믄 저그 냇가에서 잠을 잤어. 모래밭이 좋았어. 대사리가 바우에 요랬는디.(손을 모아 둥그렇게, 수북했다는 뜻) 강변에도 스물 몇 가구가 있었어. 사장나무 밑에 냇가에 독시암물(돌샘물)이 있었어. 순지 큰애기들이 시집가면서 “묵기 좋다 독시암물 못다 묵고 내가 왔네, 살기 좋은 우리 순지…” 노래도 있었지. 석대들 가운데도 독시암물이 있었어.
옛날 어른들 말 들어 보면 초상 나갖고 죽은 사람도 여그 순지 사람들이 무겁다는 말이 있어. 저그는 모래땅이고 순지 석대들 땅이 지름지고 좋다고…
옛날에는 여그가 다 뽕나무 밭이었어. 누에고 글로 먹고 살았제. 큰 창고, 잠실집이라고 잠실이 있었어. 우리가 어릴 때 가면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가 들리고 그랬어, 실 내서 베도 짜고. 자울재 넘어갖고 거까지 불 땔 나무 하러 갔어. 숭년에 나무장시도 하고 밸 장시 다 했어. 그렇게 돈 벌어서 자석들 갈쳤제.

야든 둘 하화영 율산떡은 열아홉에 순지로 시집 왔습니다.

순지는 산이 없어, 노두를 건너 생애(상여)를 매고 덕제 쪽으로 발 맞춰서 걸어갔어. 독이 요만 하든마(두 손으로 커다랗게), 크든마. 다리 밑에 보믄 큰 독들이 아직 있어. 서른 명이 생애를 매고 노두다리를 건너가, 그거 한나 신기하대.
옛날에 손으로 모 심는 디, 그때가 좋았어. 막걸리 묵고 상사디여, 노래 부르고 논둑에서 밥 묵고. 지금같이 심하게 약(농약)을 안 했어, 그 독한 쌀을 묵은 게, 아조 참말로 밤나(밤낮으로) 아퍼싼게. 그때는 상어 지름 내갖고 모뽁지에다 착착 삐리고 다녔제. 그라믄 지름에 메루가 엉거갖고 마악 떨어져, 그랑께 그때는 그것이 약이 아니여. 그때는 메루 밖에 없었는디, 다른 벌가지(벌레)가 생겨가지고, 그러고는 농약이 나왔어. 그 시절에는 풀을 베다가 논에다 안 풀을 안 했소. 그때는 나락도 요만해요, 째깐했어, 수확은 못냈제.

야든 여섯 강단엽 용산떡은 스무살에 순지로 시집 왔습니다.

재송에서는 관산이 더 가직해. 6.25 지나고 걸어서 신랑 얼굴 보도 안 하고 시집 왔어. 그때 뚬벙가로 뺑 둘러 능수버들도 있고 미나리꽝도 있고, 연꽃이 볼만했어. 농사짓고 일 많이 했지라, 얼매나 목화밭이 많아갖고 여름내 풀 매고…
시집 왔을 때 시아제가 나하고 야닯살 차이구마, 중학교 댕겼어. 전대 나오고 옴천으로 선보러 같는디 돌아오면서, ‘성수 큰애기 봤소, 어찌 생겼습디까,’ 하하하… 물어서 즈그 언니 만은 못해도 괜찮합디다, 귄은 없어도. 그란디 워매워매, 우리 시아제가 스물아홉에 세상을 떠 부러요.

야든 셋 김소순 석동떡은 스물하나에 순지로 시집 왔습니다.

시집오니까 신랑이 군인이었소. 신랑이 나보다 나섰제, 이뻣제. 휴전하고 바로 제대했소. 쌀 닷 대 갖고 저금 낫소. 신랑이 하다 좋아서 (결혼)했는데 인제 묵을 것이 없는께 밤나 언지 집서 밥도 묵고, 쌀도 갖다 주고, 그렇게그렇게 살았제. 욕 봤소, 우리 언니가 욕 봤소.
인제 나는 여그서 혼자 살고 영감이 서울로 가서 고생을 해서 벌었제. 여러 해 살았는디 딸 둘 나아놓고 아들 낳다한께 와갖고 서울 안 가고 주저앉았어. 딸 나았으면 안 온다게.
서울서 벌어갖고 와서 땅도 사고 집도 사고…

야든 셋 김정애 군동떡은 스물하나에 순지로 시집 왔습니다.

시집 왔을 때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고, 우리 아저씨가 광주고등학교를 나왔고 시아제도 광주 조대부고 다니시고…
우리 아저씨는 군대 갔다 오셔서 소장사 하고 살았어요. 소 사러 해남 송지장에 걸어댕겼어. 이틀밤 자고 오세, 그래갖고 장흥장에서 팔아요. 소 한 마리 가지믄 애기들 교육 시킨다고 그랬어요. 소장사 해가지고, 자석들 육남맨지, 교육 시키느라고 욕 봤소.

이후에도 순지 늙은 큰애기들의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여기저기서 요란스러웠습니다.

시집 오니까, 여그 순지가 수준이 높으데요. 우리는 중학교를 못 나왔는데 여그 아가씨들은 목포상고 댕기는 사람도 있고, 중학교를 다 다니고 있고… 아무리 없어도 지게 지고 나무하러 안 보네, 다 학교를 보내든마. 그래갖고 공무원이 집집마다 안 댕긴 데가 없어.

보통 5남매 6남매, 남학교(장흥남초등학교)가 순지학교라고 했어. 물 아래(덕제 쪽) 애기들이 해볼 수가 없었어.

그때 엄마들은 참 바뻤어. 일할라 애기들 벤또 싸줄라, 지금 사람들은 학교에서 다 급식을 하니까, 머이 성가셔, 없는 사람들은 못 싸준 사람들도 있고, 그때 당시 없는 사람들은 힘들었어요. 지금은 있으나 없으나 묵는 것은 평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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