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동학농민혁명 웅치접 구교철 대접주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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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찾고 있다.
1894년 일본군과 싸웠던 장흥사람 구교철具敎轍. 그해 11월 동학농민혁명군 웅치접을 이끌고 장흥부를 함락하려고 기포하였던 사람. 12월 일본군과 3만의 농민군이 혈전을 벌였던 장흥 석대들전투 후 그는 홀연 사라졌다.
그의 부재가 쓸쓸하여 바퀴자국, 흔적의 뜻을 가진 철轍 자가 문득 눈에 밟혔다. 우리는 그의 행적을 찾고 있다. 그로 해서 2020년 현재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 가족의 생활사와 마을사를 기록하고 있다.

“12월 3일에 적들이 성(장흥부 장녕성) 밖에 바로 이르렀다. 방언(남면접 이방언 남도장군)은 평화(平化) 송정(松亭)의 산등성이에, 인환(대흥접 이인환 대접주)과 교철(웅치접 구교철 대접주)은 건산(巾山) 뒤쪽 산등성이에 주둔하였다. 방서(금구접 김방서 대접주) 등은 벽사(碧沙) 뒷뜰에, 사경(용계접 이사경 대접주) 등은 행원(杏園) 앞뜰에 주둔하였다.
그 기세가 바람이 몰아치고 벼락이 치는 듯하였다.”
_영회기永懷記(작자 미상_보성군 회천면 회령리 문재국 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마당 지역사례)

장흥동학농민혁명 구교철 대접주는 장흥의 이방언, 이사경, 이인환 대접주들과는 달리 이렇다 할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있지 않아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있다. 또한 잡혀가 심문을 당하거나 일본군에 학살당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른 접주들과 달리 지금까지 구교철 대접주의 생가마을이 어디인지도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았다. 어느 산야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을까.
일제강점기 1930년대 장흥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해방 후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친일경찰에 쫓겨 산으로, 빨치산으로 도망 다니다가 어디서 무덤도 없이 스러졌는지 모르는 것과 한가지다.

어찌하여 광주에 사는 구교철 대접주의 증손 구원주 선생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증조부에 대한 기억과 기록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다만 증조부가 사셨던 곳이 기동마을이고, 1894년 장흥동학농민혁명 석대들 전투 후 멸문지화를 피해 처가였던 화순 동복 오 씨(화가 오지호의 가계)네로 온 가족이 피난했다고 말했다. 그도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지금 기동마을에는 구 씨 누구도 살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우리(장흥동학농민혁명 중등용 부교재 편집위원회)는 장흥군 장평면 청룡마을과 기동마을로 찾아갔다. 기동마을에서 한 어르신(경주 김씨)을 만났다. 1900년 전후 경주 김씨가 들어오기 전 구씨들이 세거를 이루고 살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지만 구씨들이 딛고 말을 탔던 말독(돌)이 마을 동구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다. 그 아래 산에는 구씨 묘소가 있다고도 했다. 또 한 어르신은 당신의 처가가 웅치라서 예전에 이곳 기동마을에서 자주 걸어서 다녔다고 말했다. 1894년 불을 맞고 구씨들이 모두 황망하게 떠난 것이 분명했다.

장흥 석대들전투 패전 후 특히 대접주의 마을은 “불을 맞았다.” 지난 동학기행에서 우리가 만난 용반마을 이사경 대접주의 증손은 그 당시 불을 맞아, 온 마을이 전소되었다고 말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냥 가옥에 불을 지르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탈취하고 여인들을 능욕하면서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언어로 어찌 표현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이 “불을 맞았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기동마을 동구 풀숲을 헤치고 말독을 확인했다. 이어서 청룡마을 앞산을 이 잡듯이 한 바퀴 돌다가 마침내 구교철 대접주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을 찾았다. 최근 묘를 쓴 후손들은 ‘東學鬪士 長興府 熊峙接主 綾城具公 敎轍’이라 새겨놓고 있었다. 물론 구교철 대접주의 육신이 부재한 가묘다. 부인은 영광 김씨로 새겨져 있다. 그 옆의 아들 천우의 묘에는 부인 동복 오씨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석대들전투 패전 후 아버지의 부재를 뒤로 하고 아들은 가솔들을 이끌고 처가인 화순 동복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웅치면지를 보면 유산리 내동마을 입구에 충의각이 있는데 그곳이 웅치접의 집강소였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또한 당시에는 영광 김씨 소유였지만 지금은 광산 김씨 소유라고 했다. 당시 농민군으로 활동했던 영광 김씨 김보열이 이곳을 집강소로 내놓았다고 적혀 있다. 웅치는 지금은 보성군 소속이지만 1894년 당시에는 장흥부 관할이었다.

기동마을 동구 말독(돌)을 딛고 말을 타고 웅치로 달려갔을 구교철. 그의 처가가 혹시 웅치가 아닐까. 근거지도 아닌데 어떻게 웅치접을 책임지는 대접주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장평면 기동마을에서 웅치면 내동마을로 가는 길은 몇 고개를 넘어가는 주름진 산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를 찾아가는 우리의 길도 첩첩산중이겠지만 너무나 가고 싶은 길인 것이다.

_그림은 ‘처의 상’ 1936 오지호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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