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들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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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커피가게, 물고기들의 숲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Cafe de Flore’는 프랑스의 문예 살롱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이 모여 문학과 철학, 예술을 논했던 곳이라 한다. 샤르트르와 보부아르, 헤밍웨이와 아폴리네르, 롤랑바르트, 알베르 까뮈, 앙드레지드, 랭보 등이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던 문인들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4CATS(Els Quatre Gats)’라는 카페는 그 유명한 피카소의 첫 전시공간이자 단골집이었다. 피카소나 미로, 라몬카사스, 같은 당시 화가들이 모였던 중요한 장소로 누구든 예술과 토론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영국의 ‘The Elephant House’는 가난한 조앤 롤링이 끼니를 굶으면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종일 해리포터를 집필했던 카페로 알려지면서 해리포터 팬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다방과 술집들이 종종 있었다.

시인 이상이 금홍이와 종로1가에 운영했다는 제비다방 역시 가난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가난한 예술가 손님밖에 없어 2년이 지나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곳이다.

박인환과 이봉구가 드나들었던 위스키점인 명동의 포엠이나,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다는 은성주점도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천상병 같은 그 골목의 예술가들이 시간되면 하나둘씩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쓰고 노래를 했던 곳이다.

90년대에는 신촌과 홍대에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그만큼 카페와 술집들이 많았다. 이름 없는 인디밴드들이 무대를 설 수 있었던 것, 작은 카페에서 연극공연을 하고, 그림과 사진이 전시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을 가장 환대하는 곳도, 예술가들이 마음 편하게 배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도 카페인 적이 많았다.

그들이 배회하다 머무는 곳에서 그 골목의 문화가 살아나고 그 골목속의 예술도 살아났다.

설악산 박그림 선생의 산양 이야기를 들으러 물고기들의 숲에 모인 사람들

전남 장흥에는 물고기들의 숲이라는 작은 커피가게가 있다.

읍내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했으며 이제 문을 연지 겨우 2년 반이 조금 넘어간다.

융드립 커피만 내리는데, 흔한 라떼나, 카라멜마끼아토 같은 달콤하고 로맨틱한 커피가 없다. 주스나 흔한 과일차 하나 없으니 많이 무뚝뚝한 곳이다. 이 무뚝뚝한 곳을 물어물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근간에는 물고기들의 숲을 모르면 인문학적인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말이 간혹 회자된다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들은 적이 있다. ‘물고기들의 숲’이 그냥 커피전문점이 아니라 문화를 소통하려고 노력했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는 모양이다.

‘물고기들의 숲’에서는 오픈 후, 열다섯 번의 전시와 열세번의 콘서트 및 강연회가 있었다.

집시나 선지자 같은 음악가들의 공연이 있었고, 탈핵, 생태, 환경, 페미니즘, 기후위기 관련 강연들이 있었다. 첫 개인전이었던 화가도, 그림일기를 썼던 농부도, 생애 첫 시쓰기를 했던 할머니들의 시와 그림도,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중견사진가들의 전시도 있었다. 시골변두리 작은 커피가게에서 뭐 재밌는 걸 참 많이도 한다며 손님으로 오셨던 분들은 오며가며 전시를 눈여겨보고 콘서트에 찾아와 박수를 쳤다. 환경활동가들의 강연을 듣고 관객들 스스로 모자를 벗고 후원금을 걷어 보태드린 적도 있다.

‘물고기들의 숲’에서 하고 싶었던 건, 그냥 그런 것들이었다. 작업자와 관객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그 사이에 자본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어지도록 가교가 되어줄 수 있는 공간. 친구를 만난다고 약속을 하지 않아도 오면 만나지는 곳. 번잡한 시간에 구석에 혼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눈치 보이지 않는 곳, 밭일을 하다 흙장화를 신고 들어와도 부끄럽지 않고, 조각을 하다 돌가루를 뒤집어쓰고 와도, 작업을 하다 구멍 난 앞치마를 입고와도, 자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와도 부끄럽지 않은 읍내가게. 가끔 누군가 악기를 연습하다 즉흥공연이 이뤄지기도 하는 곳.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곳.

가끔 문을 잠그고 홀의 불을 끄고 밤 깊은 줄 모르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아지트에서 우리는 살아난다.

언젠가, 전설처럼 장흥 어느 변두리에 그런 커피가게가 있었다고, 그 시절이 그립다고, 그 시절에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고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참 좋겠다.

물고기들의 숲 풍경. 주인장과 사람들이 뜨개질을 하고 있다.
커피를 내리는 박지산. 오른쪽 그림은 그가 그린 작품이다.
멀리 설악산에서 박그림 선생의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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