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들이 살았던 장흥 장평면 내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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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들이 살았던 장평면 내동마을

나망골, 된재, 뒷골, 딘지릿골, 말봉재, 목넝기, 무덤실, 무제밧골, 방죽골, 베락바우, 새모실시암, 쇠실, 쇠실고랑, 신방골, 잿몰, 재시암, 조팍골, 텃골, 텃골재.(장평면지, 1996년, 장흥문화원) 산 속에 있는 마을이라 안골로 부른 장평면 내동(內洞)마을의 지명이다.

1908~1920년 장평면의 항일의병들은 일본 순사들을 피해 된재를 뛰어넘어 아주 깊어서 가기에 힘든 딘지릿골에 숨어들었을 것이다. 삼정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쇠실에 가서는 배가 고파 옥수수나 고구마도 얻어먹었을 터이고.

의병장은 1907년 일제의 조선군대 강제해산으로 고향마을 내동에 돌아온 조선군 출신 임학현(任學鉉)이었다.

보성과 가까워 예전에는 보성장을 주로 이용했다는 내동마을과 인근 녹양리 등지에서 살던 야문 사람들이 독립적인 의병부대를 은밀하게 조직한다. 의병장은 1907년 일제의 조선군대 강제해산으로 고향마을 내동에 돌아온 조선군 출신 임학현(任學鉉)이었다.

부대원은 그의 아우 임규현(任圭鉉)과 녹양리 사람 노전석(盧全錫), 봉림에 살던 주덕행(朱德行)과 양촌리 한순채(韓順采), 내동리 문화삼(文化三)과 축내리 고제민(高濟民)이었다.

의병 임학현 조카 임태주(장흥군 장평면 내동마을)

조선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을 살았던 사람

조선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대한민국을 살았던 사람, 임학현.(1881~1950) 그의 이름을 처음 본 건 <문림의향 장흥설화>(장흥문화원, 2017)에서다. 그 책에서 그의 조카 임태주 어르신(임학현의 형 임필현의 아들)은 작은 아버지를 ‘신출귀몰 독립운동가 임학현’으로 구술하고 있었다.

마침 묻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 일단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독립운동가 판결문에서 임학현을 입력했더니 간결한 두 건의 기록이 나왔다. 1910년, 30세, 폭동, 강도, 징역 종신, 광주지방재판소 / 1921년, 40세, 보안법위반, 주거침입, 강도, 무기징역, 광주지방법원목포지청.

그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대한제국)군 보병이었다. 일제가 1907년 조선군을 강제 해산하자 고향 장흥에서 아우 규현 외 여러 동네 사람들과 의병을 조직한다. 1910년 체포되어 1920년 석방된다. 곧바로 다시 의병을 조직하여 동지들과 장평경찰관주재소(양촌, 현 장평중학교 관사)를 습격한다.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금하러 친일부호의 집을 침입하던 중 조선인 순사가 포함된 일본경찰과 격투하다 체포되어 다시 20년의 옥고를 치른다.

의병 임학현이 만들어준 구두를 신구 결혼식을 올린 정남기

그는 독립운동과 함께 신발을 만들고 수선하는 일을 했다. 그를 알고 있는 정남기 어르신(1926년생, 장평면 내동2구 삼정마을)을 만났다. 그가 만들어준 구두를 신고 결혼을 했다고 또렷한 기억을 이야기했다. 안중근 의사에 버금가는 독립운동가라고 어르신은 말씀하시며…

항일의병 임학현은 해방 후 또다시 감옥에 투옥된다. 미군정기 빨치산에게 무기를 수리해주었다고 포고령위반으로 목포형무소에 투옥된다. 그는 독립운동 하느라 결혼도 못해 가족도 없다. 1950년 감옥에서 나온 그는 보성에서 장평으로 넘어오는 질마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소식을 듣고 일가친척이 찾아가 가매장 했지만 한국전쟁 포화 속에서 무덤은 유실되고, 그를 기릴 산소도 지금은 없다.

일제강점기 30년 감옥살이, 그는 아직도 국가가 지정하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다. 지난 6월 그의 독립운동 공적서를 적어서 광주보훈청에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제출했다. 2020년 3.1절에 심사해서 포상여부가 결정된다고 연락이 왔다.

임규현은 19205, 항일의병투쟁으로 10여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형 임학현과 함께 노전석, 주덕행, 한순채, 문화삼, 고제민을 만나 다시 의병을 조직한다.

임규현(1887~1927)은 일제에 의해 1907년 조선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형(兄) 임학현 외 5명과 함께 항일의병을 조직한다. 이후 1908년부터 항일의병투쟁을 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폭동 등 죄명으로 1910년 1월 임학현과 구속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다.

또한 그는 1920년 5월, 항일의병투쟁으로 10여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임학현과 함께 노전석, 주덕행, 한순채, 문화삼, 고제민을 만나 다시 의병을 조직한다. 1920년 5월 22일 임학현, 노전석, 주덕행, 한순채 등 의병동지들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장평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한다. 이후 의병동지들과 영암군 영암면 한대리, 장흥군 장동면 북교리,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강진군 옴천면 황막리 등지 친일부호의 집에 들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펼친다.

임학현은 192153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병고를 얻어 1927830일 순국한다

그는 1920년 12월 29일 영암군 금정면에서 일본경찰과 전투 중 피체되어 장흥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보안법위반 등으로 구속된다. 이후 1921년 5월 3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후유증으로 병고를 얻어 1927년 8월 30일 순국한다. 의병 임규현의 공적서다. 아직 국가에게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했다. 2020년 3.1절에 포상 여부가 결정된다.

얼마 전 운주사 가까이 있는 화순천태초등학교 선생님과 6학년 학생들이 장흥을 찾아 내동마을로 안내했다. 장흥의 독립운동사를 알고 싶다고 했다. 마침 임학현 의병장의 조카 임태주 어르신과 그의 둘째 아들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4대에 걸친 가족사의 비밀을 기록하고 싶어 사료를 찾아왔다고 했다. 앞으로 4대에 걸친 비극적인 가족사를 소설로 쓰려한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에 있는 후배가 운영하는 연극단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들의 역사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극본을 쓰고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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