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은 날라와 더불어, 되자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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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백두산, 한라산만 그런 게 아니다. 태백산, 소백산, 백운산, 무등산… 한반도의 골 깊은 산이란 산은 어디 하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이 땅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100여 년 간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얘기다.

여기 부용산 역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이맹 장군은 장구목에서 화살로 왜적을 물리쳤다.

1895년 1월 8일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가 석대들에서 벌어진다. 관군과 일본군, 특히 일본군은 이동용 포와 라이플 등 최신무기로 석대들에 운집한 3만 여명의 농민군을 학살했다. 거기에서 살아남아 이곳 부용산으로 피신한 농민군들 역시 몰살당했다.

1908년에는 항일의병들이 일본군과 싸우다 산화했다. 일제의 감시가 유독 삼엄했던 장흥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지 못하고 이곳 부용산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부용산을 중심으로 원등ㆍ계산ㆍ인암ㆍ청전ㆍ어산ㆍ접정ㆍ운주마을 청년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 투옥되었다. 모진 고문이 이어졌고 감옥살이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부용산 인근의 사정이 이 정도였다. 아시다시피 식민지배의 억압을 혁파하고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셀 수 없이 많다. 여기서 그분들을 다 호명하거나 그 사연을 풀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부용산은 약초와 야생화로도 유명한 산이다. 그 생명들은 혹여 산화해 가신 임들의 화신이기도 하겠거니…… 산은 그 많은 이들의 도피와 공포, 죽음을 껴안으면서도 제게 주어진 신체적 조건 속에서 약초와 꽃으로 때로는 새들의 울창한 노래로 세월을 견뎌온 것처럼 보인다. 

두 달 전부터 우리는 운주마을의 450년 된 당산나무 아래서 부용산이 그러했듯이 그 기억을 표현할 방도를 찾느라 동분서주 했다. 그냥 밥 먹고, 떡 먹고, 술 마시는 문화제가 아닌 겁나게 다른 어떤 것을 맹그라 보고 싶었는가? 고령화로 지난 100여년의 스토리마저 구비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지금 역사에 대한 기억의 방식을 암중모색 한 것인지도 모른다.

판화가 박홍규 씨가 운주마을의 최두용ㆍ고삼현 선생, 어서마을의 문병곤 선생, 접정마을의 유재성 선생의 생애를 작품으로 형상화 했다. 변대섭 작가는 부용산을 마주보는 위치에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작품을 설치했다. 가수 해와 씨는 <구름이 노는 마을>, <부용사>를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불렀다.

또 인암마을의 정종숙 어르신, 운주마을의 고재현ㆍ이용수 어르신은 독립운동가들과 부용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마을에서 태어나 그 마을의 살림살이는 물론이고 각 시대의 산증인으로서 다른 세대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리, 그 이야기와 역사를 문화예술로 빚어내는 자리.

장소성과 슬프고 아픈 기억의 문제는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현장에 발을 디뎌야 새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십시일반으로 성의를 모으고 그 현장을 살아오신 마을어르신이 이야기를 풀고 그 이야기와 공간을 예술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하며 공유하는 자리 말이다.

부용산은 아주 높지도 크지도 않은 묵직한 산이다. 산의 위세는 평평한데 다부져 보인다. 운주마을의 당산나무는 부용산과 더불어 최소한 자신의 수령 450년 만큼, 임란에서 동학을 거쳐 독립운동, 이후의 현대사를 직접 혹은 풍문으로 다 듣고 봐 왔을 것이다.

그 거대한 뿌리를 박고 선 나무는 바람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시를 웅얼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노래 –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靑松錄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관련기사>

  1. 부용산
    http://www.jangheung.go.kr/tour/attractions/tour_total?mode=view&idx=376
  2. 개벽신문 제73호, 2018년 4월호
    https://brunch.co.kr/@sichunju/346
  3. 개벽신문 제74호, 2018년 5월호
    https://brunch.co.kr/@sichunju/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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